본문 바로가기
내가슴언저리

"길".. 설야 조선희

by 파자.다정.설야 2012. 12. 20.

하나님.. 불쌍히 여기소서..!


.. 길 ..

조 선 희
.. 길 ..

큰 동생이 한국에 왔다.
취업 1년 인턴 수련의 과정을 위해서다.

등줄이 꺾이도록 추운날도
아낄세라
아궁이 연탄구멍 엇 맞추어가며
제대로 된
양말짝 걸치지 못하고 살아오신
청상의 어머니에게 자부심이었을
동생이 온 것이다.

30여 년 전
고국을 떠날 때
세상 거칠 것이 없었을 동생..

벗겨진 이마에
뒷머리는 이미 은테를 두르고
병원에 제출할 서류를 구비해 온 것이다.

『 저는 1954년 -월 -일생으로
1972년 인천D고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1979년 의과대학을 졸업하면서
ECFMG시험을 보고
아내가 있는
카나다로 이민을 가서
의사로 일할 계획을 키우며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치면서
곧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1983년
카나다병원에 인턴을 지원하기위하여
카나다 의사 국가시험
(Medical Council of Canada Evaluating Examination, MCCEE)을 보고
카나다의 각대학병원에
인턴지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각 주의 대학병원에
원서를 보냈지만
먼저 요구하는 것은
카나다 의료기관에 있는
사람들의 추천서였습니다.

카나다에서 의료경험을 쌓으려고
각 병원에 원서를 냈는데
먼저 카나다에서의
의료경험을
요구하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카나다 의료기관에서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추천서를 얻지 못하고
인턴수련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제도적으로
외국에서 졸업한 의료인을
받아드리지 않는 것을
미리알지 못했던 저로서는
큰 시련이었습니다.

카나다에서
의료인으로 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한 것을 경험하고
또한 가족을 부양해야할 책임 때문에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자영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민오면서
한국 국적을 포기한 상태여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 후
카나다 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는 주의
한인회회장으로
교민을 위해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또 제가 다니고 있는 교회를 통해서
카나다의 원주민
카작스탄. 하이티등에
선교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선교지
특히 하이티에서는
내가 배운 의술을 통하여
선교를 감당하면
더욱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오랜 기간 동안
의료와는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 기회가 주어져 수련을 받고
GP로 외래환자를 진료할 수 있으면
이 모든 것을
의료선교에
쓰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

자신을 인정해 달라고
조심스레 써내려간 자기소개서엔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호소하고 있다.

한때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거와 같이
허탈했을 내 동생..

고향 그리워
잠시도 쉴 수 없었을 내 동생..

현실 앞에서
어제와 같이 기쁘던 내일을 기다리며
한숨 돌릴 틈이나 있었을까.

남편을 부탁한다며
지금이 바로
때가 열린 것이라 보내온
올케의 통화내용에는
두 자녀를 그 사회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인재로 성장시켰으나
부부는
늘 그늘 속에 살았다는 회한도 곁들였다.

그렇다

지금 이것이 바로 축복이다.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우리 가옥의 온돌문화를
몸소 알려왔다는 그가
이제 서둘러야할
의료선교의 행로 따라
힘차게 전진 할 수 있도록 기다리자.

오늘도 막내 딸 보다 어린
인턴들 틈에서
전혀 유행에 민감하지 않은 청년처럼
가방을 둘러메고
퇴근하여 올 동생을 위하여 준비하자.

늘 받고만 살아온 누나로서
고마운 마음 돌리지도 못 한 채
이제 사회의 손 까지 놓았으나
마른손 가득
보답하는 정성 담아 저녁을 짓자.

잇몸이 부어
틀리가 잘 끼워지지 않는다 하니
바지락 물에
우 거지와 된장 넣어
속 풀이 국을 끓이자

풍성한 결실 잔뜩 풀어낸
가을걷이 고추 잎 푹 데쳐
고추장과 마늘간이 배도록 주물러
깨알도 뿌리자.

묵은 김치는
종종 다져 가루에 개어 부치자.

솥에서 끓고 있는 밥 위로
톡톡 쏘는 깻잎에
간장 두른 종지 얹고
한켠에 밀가루 개떡도
질게 반죽하여 두어 덩이 찌자.

입안이 개운하도록
짠지도 몇 잎 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