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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슴언저리

조선희(설야)의 수필 " 애상 "

by 파자.다정.설야 2009. 6. 24.
 

 
  

 
 .. 애 상 ..
 
 

이제 석양에 기대어 있는 자신을 실감한다.
실상 빨래줄에 옷들처럼
걸쳐져있는 주위의 상황들이 그러하기도 하지만
쪼그라진 어깨너머의 지난날들이
시시각각 진한 연민으로 거듭나기를 반복하며
다그쳐오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리라.

또한 훈련에 응하는 훈련병이 그에 점차적으로 익숙해지면서
긍정적으로 순응해 갈수 밖에 없는 것처럼
그것이 바로 인생사의 법칙이기 때문이기도 한것이리라.

어떻든 전란의 어려운 시대를 등에 지고 살아오신 어머니께서
어느 새 구순을 바라보시니 인생을 눈 깜짝 할 사이에 비교하더라도
분명 적지 않은 날이 함께 흐른 것이다.

흔히 “안개와 같고 아침에 피어지는 풀잎 같으며
하루가 더할수록 근심이 되니 즉 눈물과 한숨의 세월이었다” 라
더러 우리네 삶을 표현하기도 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히 주어지는 길이다.

멋모르고 걸어오긴 했으나 돌이켜 보면
내게로 주어졌던 세상은 바로 한치 앞을 알 수 없었으며
아주 작은 계획도 보람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찾지 못 하므로서
바닥이 드러나도록 몰리던 자존심에 덮개마져 씌우며 살았어도
결코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정작 손 벌려 호소해 봐도 쉬운 것이 없었고
거저 갈 수 있었을 것만 같던 길 또한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듯 비록 잘 입던 못 먹던 허술한 이정표라도
제대로 거두지 못하며 거쳐 온 삶이었다 손치더라도
역시 체험처럼 엮어놓은 생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기에
이 또한 소중할 수밖에 없어서 인가.

때론 버리고 싶으리만치 서러운 과거의 모습들이
이미 반세기가 넘도록 가슴 한구석에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로 남아
화석이 되어 운명처럼 마주쳐야 했던
피난의 시대를 거쳐온 사람이 어찌 우리가족 뿐이겠는가.

그러나 뒤돌아보면 내 어린 자식이 병마로 사경을 헤메이고
꿈으로 쌓아 놓았던 결혼이라는 행복의 보따리가 풀어지면서
하늘같던 제 2의 인생마져 빈틈없이 무너질 때도 있었건만
이미 잊혀진 줄 알았던 피난시절의 기억은 합해진 물처럼
어느것 보다 더 앞질러 먼저 다가오곤 했던것이다.

견딜 수 없도록 목메어오는 일들이 비록 이뿐일까 마는
이제 이모든 것들은 달리 다져놓았던 길처럼
도리어 더욱 생생하게 자리하며 주마등처럼 스쳐 다가오는데
그러나 다시 가라면 눈물이 강을 이룰 사연들 어찌 다 옮길 수 있갰는가.

영영 다시 돌아 갈수 없으리라 꿈조차 꾸어보지 않으셨을 고향 땅을 뒤로하며
공포의 비행기는 소리되어 쏟아지던 밤하늘을 머리에 이고
얼어붙은 강바닥으로 늘어선 피난의 행렬 속으로 쫓겨나듯 떠나오신 부모님에겐
지게 위로 얹어진 나와 동생이 전부였다.

눈 비비며 아무리 둘러봐도 기댈 언덕은 커녕
침이마르도록 졸라 맬 허리띠도 없이 배가 고팠던 우리가족은
사뭇 먹이를 찾아 떠도는 도둑고양이의 바로 그것이었다.

양쪽 두눈이 마주 엉기도록 추웠던 어느 날로 기억된다.
마침 우리가 숨어 들어간 곳은 어린 내가 느끼기에도
형편이 부유하게 살았던 집으로 보였으며
그 집 역시 어디론지 사정따라 떠난듯했다.

허기짐과 추위에 지쳐진 우리가족은 이미 이성이 마비되었을 터이며
마침 그집에는 내 나이 또래의 아이도 있었는지 기회다 싶어
이리 저리 바쁘게 뒤지시던 어머니가 재빠르게 겉옷을 챙겨 입혀주었으며
나 역시 별천지에 온 것같이 욕심껏 눈에 보이는 고무신을 비롯하여
하나라도 더 건지기에 흥분했던 것이다.

밖은 전쟁의 공포와 합세한 기세로 어느새 눈발마져 퍼부어 댔었다.

얼마 후 그런 시간이 흐르고 다시 떠나야할 때라 생각되었는지
서두르는 어머니에 이끌리어 밖으로 나가려는데 하얀 망또처럼 눈을 덮어쓰며
양손가득 날된장을 움켜쥐고 장독대 모퉁이에서
배를 채우시던 아버지의 남루한 모습과 마주한 것이다.

그러던 얼마 후 그러니까 그러한 생활에 익숙해 있던 어느 날..
그날도 비행기소리에 휘몰리어 불안이 가중되어 있었고
터지지 않은 빨간대포탄이 우리가 숨어있던 곳에서
그리멀지 않은 움푹한 거리에 박혔다며 더욱 어수선한 날이었다.

잠시 동생과 둘만 남게 된 땅속 어둑한 반공 호에서
차마 먹을 것이 있어도 삼킬 수 없도록 입 언저리가 자갈밭 같던 동생이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동생을 보낸 우리가정은
어렵사리 정착한 생활에서 다시 밑으로 두동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에게 다시 순간의 행복이라는 말을
인용할 수밖에 없도록 다가온 불청객은 바로 아버지의 병이었다.

병에 장사가 없다는 속담이 현실로 접하게 된것이다.
이미 청년시절부터 독학의 길에서 얻은 병이
전란을 겪으며 상할대로 깊어지면서도
가고픈 고향 땅을 못내 그리워하다
결국 나름대로 쌓아놓은 행복마져 길 잃은 낙엽처럼 흩어지는 물꼬가 되므로서
젓 먹이 동생을 비롯하여 겨울같이 남겨놓은 가족을 등지신채
기어코 나뭇잎 가지마다 울어대던 늦가을 날 세상을 뜨신 내 아버지..

그 후 많은 세월에 섞여 시간따라 흘러왔으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된장을 밥처럼 먹을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과
동생이 어찌 운명을 그리도 처절하게 달리 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무수하게 담겨있을 비참한 생각이 애석함과 범벅이 되어
이 모든것을 잘 견뎌주신 어머니에게 항상 감사하면서도
왠지 그와 같은 운명이 마치 죄나 되는 것처럼
지금도 차마 여쭈어 볼 용기가 나지 않으니 말이다.

아니. 다시 상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만만찮은 세월을 차차 거슬러 오면서
굶주림이 엮어놓은 이런 저런 현실과 접근하며
또한 주위의 사람들 이야기속에서 더 드러내 놓을 것이 없으리만치 벗겨진 행색이라 한들
그 어떤 것도 그렇듯 내 목전에서 우리 가족이 치루어 낸
그이상의 것이라 수용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사실 행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세상천지를 뒤진들 있겠는가.

다시 새겨 보고 거듭 생각해 볼수록
그렇게 팔자처럼 청상이 되어 깡 마당에 시레기 주워다가
쌀밥만 먹어도 그 날이 생일이라고 위안하시며 살아오시던
어머니의 궁색한 일생 또한 구구절절 안타까우니
한 뼘도 되지않는 이 가슴에 녹아내린 사연들
세상 다하여도 어찌 애타다 버릴 수 있겠는가.

이제 내 생애를 장식할 앞으로의 날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어린 가슴 동동구르며 산 넘어로 기울어가는
하늘 밑 노을자락이 얼도록 들떠벌이 행상나가신 부모님 기다리며
울먹이던 그때가 어버이 두분 함께하신 그늘이었으니..

그늘이었으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