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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슴언저리

부 모.. 글 / 조선희

by 파자.다정.설야 2010. 4. 29.


 

♣ 부 모 ♣  
... 부 모 ...

그렇찮아도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길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터에
재차 구급차로 동생이 실려나가자

아버지의 묘비를 땅에 묻는 바람에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이라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촌부의 아들로 태어나
청운의 꿈을 펴기에 쉽지 않은 여건으로
상실된 기력은

곧 힘겨운 병이 되어

내가 중학교 삼 학년 그 해가 떠나가기 위해
낙옆마져 슬피 울던 가을 길에
그렇게 세상을 등지신 아버지였다.

전란 후 친척의 종산 귀퉁이에
묘를 쓰기는 하였으나 세월따라
세대가 바뀌고 관리도 자율화되면서

자손들의 태도가 한눈에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
그러다 보면 지탄의 대상이 될
염려의 부분을 우려하셨던지

어머니는 칠순되던 해부터
철저하게 산소관리 못할 바에야
지금이라도 깨끗이 화장하자는
의견을 내비치시더니

팔순을 넘기자 비용에 보태신다며
푼돈까지 모으시는 것이었다.

분명 조상 섬기는 일이
어디 생활의 여유가 있고 없고에
달린 문제인가마는

일년이래야 큰 맘먹고
한두 번 찾아 뵙고 오는 데다

거리가 멀다는 이유와
바쁘다는 까닭도

또한 애꿋은 떼와 흙을 흠잡는 어떤 것도
정성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거늘
여태껏 우리 집이 그런 형편이었다.

그런데다 예나 지금이나
사는 모양새가 그저 그런 것은
어쩔수 없다손 치더라도
성장한 자식들 처신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이대로 머물게 했다가는
주인잃은 죄인의 묘처럼 될
손바닥 보듯 한 실상에

나름대로 이런 저런 생각이 많으셨던 어머니는
딱히 기댈 곳이
마땅치 않으셨을 터이고
기어이 그쪽으로 마음을 포개신 것이리라.

그러나 장녀로서 어머니의 뜻이라 밀어부치자니
내심 켕겨지는 구석이
한 두군데가 아니었다

밭을 갈때도
시기를 맞추어 일구고 윤달이나
그 해에 행하면 좋다라는 사회적 풍습과
이제 정말 마지막 가는 길인데
어느 날 당장은 더더욱 아니라는 생각의 교차로에서
더우기 기일에
꽃 한송이 마음겹쳐 놓아드리지 못했으니
형편상 시원섭섭하겠지마는
어쩔수 없다라는 변명과 핑계에 밀려
결국 아버지는 45년간 펴놓으셨던 자리를
개얹어야했고
한줌의 재로 돌아간 것이다.

많은 날을 혹시나 하며
산등성이 언덕 아래로
성묘객의 발걸음 잦을 시기가되면
아름다운 태양 가득한
길목을 돌아돌아

어디하나 잡을 곳 없었던 가슴
눈물로 적시며
삼남매를 끄러 안았을 청상의 아내와.

런닝 셔츠바람에 들개처럼 자라왔을 딸년.

얼어죽은 참새주어 먹으며
잘도 성장한 큰녀석.

젖 떨어지자 집 지키는게 버릇이 되었을 막내 아들이
역시 병 막걸리 걸머메고
찾아주지 못했어도

한 뼘 터에 묻히심만으로도
고마워하셨을 아버지..

그러나 지금은 동생이 아픈 것도 어떤 경우도
사람살아가는 생의 과정이거늘
어찌 그런 쪽으로 연결지을 수가 있었느냐며
엄하게 위로하실 나의 아버지..
아울러 조상묘 찾아 경배드리야 할 때
갈 곳이 없는 자식들의 후회와 뒤늦은 깨달음에
목이 말랐어도 아니다 용서하실 우리 아버지..

아!
오늘따라 높다란 창공을 향해 드리운
빛과 평화의 하늘은
더없이 깊고 파랗다.

그렇다
지금이라도 어머니 좋아하시는
미역줄거리에 기름 넉넉히 둘러
재차 밥상에 얹도록 해야겠다.


- 일간지게재작 -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