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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슴언저리

조선희(설야)의 수필 "마음은 눈의 창"

by 파자.다정.설야 2009. 6. 11.

 

   

 

  마음은 눈의 창 

                                       

  피난 내려오면서 내게 찾아온 삼눈이라는

눈병이 소녀의 티를 벗을 때가 되어서도 회복이 어렵던 터에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얻은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보다 더 괴로워 하셨다.


  그러나 쉽사리 미련을 버리지 못한 어머니는

양쪽 동공을 덮고 있던 하얀 자국이 한참 심할 때보다는 많이 흐려졌다 해도

유독 왼쪽 동자에 자리 잡은 흉터만이라도 묘책이 없나를 강구하셨다.

 

 그러다가 미용을 생각해서 검은 물을 들이는 것이 좋겠다는

인척의  권유로 내 눈은 그렇게 치장됐던 것이다.


  이러한  형편을 사랑해 주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별 다른 문제없게 걸어왔다는 것이 생각할수록 고맙다.

 

욕심은 한없는 것이어서 오늘도 팔순의 어머니는 찾고 있던 물건을 대신 주워주시며, 

네 눈이 이렇게 되었으나 난리 통에도 최선을 다했다며 연상 안타까워하신다.


  겹겹의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니

꽁꽁 얼어붙은 강 위로 줄지었던 피난의 행렬과

비행기소리는 내 유년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지게에 나를 매달고 무작정 떠나온 길이 다시 갈 수 없게 되리라. 

꿈도 꾸어본 적이 없으셨을 부모님은

이미 낯선 땅에서 당시 '걸렸다 하면 그만'이라는 눈병으로 고생하던 나로 인하여

애가 말라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새벽부터 부두노동과 소금 장사를 나가신 후

나는 빛을 바라볼 수 없도록 시린 눈으로 헛간이다 싶은 방안에 홀로 남아 

종일 부모님이 오실  저녁을 기다렸다. 

 

 손닿는 곳에 놓아주신 요강과 밥 한 공기는

그 시대의  많은 것을 대변한다.

 

 부모님은 몇 푼 그렇게 버는 족족

나를 둘러메고 소문이 있는 곳이라면 혓바닥이 갈라지도록 뛰고 달리셨다.


  지친 눈을 떠오르는 태양에 걸고 

어린 가슴이 에이도록 팥알을 굴리던 어느 용하다는 할머니.

눈꺼풀을 뒤집고 사정없이 침을 놓아대던 굴다리 아저씨.

연기 자욱한 움집에서 등골이 데이도록 떠대던 뜸.

더욱이 당신들의 뼈골이 녹아났을 탕약마저 쓰다않고 잘 먹어 주기에 고마워하시던

아버지께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허약해진 기력을 되찾을 수 없게 되자

기구한 팔자의 어머니는 초년에 청상이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매일 아침 약탕기를 닦아가며 

무작정 희생하신 부모님 덕분에 주어진 세월에 충분할 수 있었고, 

비록 몇 미터 앞에서 다가오는 이웃에게 먼저 인사라도 할 수 있었으면 하던 바램이

결코 내게 허락될 수 없는 시력일지라도, 

 

 아직까지 찬란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이 갈수록 새로운 데,

잇단 관리 부족으로 그동안 크고 작은 눈앓이에

이제 백내장마저 끼어든 탓인지 언젠가부터 

오만가지의 별들이 찾아와 눈만 감았다하면 더욱 성대하게 잔치를 해댄다.


  그러나 앞만 보고 지내온 생이었다 해도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니 실상 여태껏 선한 삶을 꾸려가는 계명을 제대로 지킨 것이 없으니, 

성전 뜨락에 엎드려 고하여야 할 제목이 많을 뿐 아니라 

이런 저런 사연 많은 주위를 둘러보더라도

사실 내 사정에 이만큼만 한 것이 더 없는 축복 아니겠는가.


  예부터 눈은 마음의 창이라 했다. 

현대의학에서 이해가 어려울 만치 이미 폐허가 됐을지라도 

오늘도 수없이 안경을 고쳐 쓰는 이내 가슴이 서글퍼지지 않도록

아직까지 처방전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손길이 있어 행복하다면 

바로 이 마음이 내 눈의 창 아니겠는가.

 

 2004년작  일간지 게재 작 

 

  .. 마음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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