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슴언저리

말마디 전할 길 없으니...( 글 / 설야 조선희 )

by 파자.다정.설야 2009. 3. 7.
   

 

 
주위엔 초겨울의 까만 밤이 내리고 있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따라 가을을 노래하던 등나무 아래엔
쌓여진 낙엽들이 다시 길을 잃고 흩어진다.

창마다 걸린 불빛을 흡수하며 우뚝 서 있는 병원 건물 곁으로는
조문객을 동반한 차량들이 줄지어 정문을 통과한다.

이윽고 나의 시선은 후미진 곳에 머문다.
아! 그가 안치되어 있으리라.
왜 이다지도 쓸쓸한가.
함께 문상하기로 한 오빠를 기다리며 한참을 서성이던 나는
바로 옆 벤취에 주저앉는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옷깃을 여미며
그리움만큼이나 긴 머리 자락을 쓸어 올린다.

오늘따라 앙상한 나무 가지사이로 설렁이는 바람마져도
애타게 절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하얀 꽃다발을 다시 끌어안으며 하늘을 향한다.
머 언 저편으로부터 검은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금방이라도 빗 방을이 쏟아 질 것 같은 하늘에 눈길을 묻는다.

더러의 사람들이 그러했으리라.
소녀시절의 나도 꿈이 가득한 세계와 가까이 했다.
릴케의 시집을 가슴에 얹고
달리 알지도 못하는 인생 의 아픔을 논하기도 ?다.

연두 빛 봄. 짙푸른 여름. 외로움이 마른 잎 되어 내리는 가을.
하얀 세상을 잉태해내는 겨울. 그런 계절에 상관없이
내 마음의 울타리 안에서 여행하는 것을 즐겨했고
아름다운 낭만이 깃든 허구의 대상자를 찾아
화폭없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제 지내온 생애의 언덕에서 뒤돌아보니 어쩔 수 없게라도
그것은 내 몫으로 주어 질 수밖에 없었던 부분이었기에
이처럼 그를 내 안에 간직하게 된 것이리라.
따라서 빠져나올 수 없는 그리움이란 터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게 되면서
때문에 나를 그토록 방황하게 한 그를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몇 수십년전 그 해의 어두운 겨울이 떠날 무렵이었다.

그는 외사촌 오빠의 친구였고 대학의 계단을 밟기 시작하면서도
나는 수줍음 가득한 소녀였다.

옥토의 고장에서 태어나
시대의 명문대를 주름잡던 그와의 아무렇치도 않은 듯한 만남이
꿈 많고 예민하던 시절에 무작정 사랑의 전령사로 다가와서
허락도 없이 그는 나의 깊은 가슴에 그렇게 자리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말로 순수하던 나에게 비추어진 사람.
그 후 나는 홀로 가슴에 등불을 켜고 깊게 마음을 앓기 시작했다.
그건 나만이 오로지 그를 향한 정열이었기 때문이리라.
밤 지새우며 용기 없어 보낼 수 없는 사연을 쓰고.
다시 지우며 그런 애달픈 날이 흐르면서
말마디 전할 길 없었던 나의 더운 가슴 또한 따라서 수척해져만 갔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는 결국 졸업과 동시 미래가 촉망한 기업에 발탁되어
희망의 나래를 펼치면서 직장생활을 한다더니
연이어 외사촌 오빠의 또 다른 인척과 열애중이란 소문 후 얼마 안 있어
그는 찬란하게 아름다운 한 여인의 남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목련이 지던 까만 밤. 하늘 언덕. 그 위에 자그마한 그가 다니던 예배당.
붉게 물든 가을의 교정에서
무척이나 슈벨트의 세레나데를 좋아 한다던 그 ..
더욱이 하늘과 땅 사이에 살면서
태어난 만큼 진실한 사람이 되고 싶다던 그 ...
닫혀지지 않는 가슴으로 하여 그가 흘려버린 말마디까지가 소중해서
아주 많은 것을 잃어버린 거와 같이 초라하던 나에게도
흐르는 시간은 묘약이었던가.

나도 결혼을 하게 되었으나
이미 허약해져 버린 마음을 회복한다는 것 또한 그리 수월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소식에 궁금했고. 직업을 잃었다는 소문. 사업에 손을 댔다더니.
그 후 얼마 안 있어
유달리 비가 퍼부어 대던 어느 날 아침 배달된 신문에
그가 떠들썩하게 둔갑해 있었던 일... 대 사기꾼으로 말이다.

극히 생소한 무리에서나 가능한 사실로만 알았던 나에게 있어
그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슬픔이었다.
잇달아 그는 외국으로 도주했고 더 한번 아주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오로지 떠나가는 것만 알았던 사람.
그런 그가 지병으로 많이 고생한다더니 ..
그 사람이 아주 그렇게 가버린 것이다.
그래도 찬란한 우리 고국의 땅에서 말이다.

맞은 편으로부터 세차게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에 아까부터 멍울 진 구름사이로 울먹거리던 하늘에서는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친다.

내 마음에 .. 이 가슴에..

- 일간지 게재작 -


 

 말마디 없으니...  
 
 

'내가슴언저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희(설야)의 수필 " 애상 "  (0) 2009.06.24
조선희(설야)의 수필 "마음은 눈의 창"  (0) 2009.06.11
정년퇴직 ( 2003. 3월작 )  (0) 2008.12.25
어머니  (0) 2008.12.23
뚱딴지  (0) 2008.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