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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슴언저리

뚱딴지

by 파자.다정.설야 2008. 12. 23.

 

 






.. 뚱 딴지 ...

시골에 다녀오다
밭 두렁에서 캐온 것인데
맛이나 보라면서 직원이 건네준다.

살펴보니 어릴 적
두더지처럼 땅을 헤쳐 엉켜 붙은 눈만 대충 떼 내고
허벅지에 문질러 달게 먹던
돼지감자라고도 하는 뚱딴지인 것이다.

이때나 그때나
어째 목구멍에서는 그렇게 보채던지
원래 표면이 곱지 못한데다
사이에 끼인 흙이 제대로 털리지 않아 서걱거려도
무작정 삼켜대던 뚱딴지가
이래저래 수십년 추억속에
전혀 변하지 않은 자태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반가움에 대뜸 한 차례 깨물어 씹는 순간
희고 부드러운 속살에 곁들여
미묘했던 그 맛으로 되살아나는 지난 날이 눈앞을 가린다.

초년시절,
우리 가정은 시에서 운영하는 종축장내 관사에서
내가 소녀기로 접어들면서
아버지가 세상을 하직하실 때까지 살았다.

그동안 셋방살이는 면했으나
힘든 병으로 시달리고 계셨던 아버지를 포함하여
배가 고픈 가족이었다.

높다란 미루나무 줄지은 언덕 아래로
동네가 내려다보이던 가축장은
축사를 포함하여 꽤나 넓었고
당시 동남쪽을 바라보며
목재 통나무를 소재로 건축되었던 관사는
누가 살았던 곳이었는지 그 시대에
마치 작은 궁전과도 같이 아름다운 집이었다.

뜰아래 여러 모양의 바위와
앵두. 복숭아. 살구. 매화. 찔레등이
철 따라 모습을 다투었고 등나무를 끼고 열리던 정원은
크고 작은 벚나무와 노송들로
대자연의 절묘함을 연출하기에 바빴었다.

샛길을 따라 우사 돈사 계사를 돌아 나오면
여름철 가뭄에 원거리의 사람들까지 사용하는
넓적한 우물 옆으로 빼곡하게 자리했던 뚱딴지 밭..

가축의 사료로 재배되었던 뚱딴지는
배고픈 아기가 찾는 엄마의 젓 무덤처럼
어린 나에게 원하는 대로 손을 잡아 주었고
유일한 안식처였다.

생각해 보면 굳이 형편이 그래서라기보다
어딘가 남다르게 타고난 먹성 때문이라 해야 할까.

먹어도 해롭지 않고 입에 맞았다하면
뚱딴지를 비롯하여 당시에 비료로 퍼부은 인분에 녹아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또래들 중 나처럼 뜯고 따서
파먹어 대던 경우는 드물었던 것이다.

건강만은 자신 있게 말 할 수 없다 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구충약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지도 않았으며
청결이라는 단어가 사치처럼 다가왔던 생활속에서
벌겋게 갈라진 손과 발을 가지고
정말 별탈없이 커온 것을 보면
부족한 것이 도리어 복이 되어
미래사회에 다가올 자연식 우월주의를 터득하고
일찍부터 건강으로 가는 지름길을 걸어 온 셈이다.

지금은 양질의 식품으로 알려져
더러 판매가 성행한다는 뚱딴지..

그렇다. 내가 지금누리고 있는 삶의 초석은
어느 모로 보나
그때의 바로 그것이 원동력이었을 진데
이만한 축복이
눈 비벼 다시 생각해 본들 또 어디있겠는가.

실상 송림이 울창한 집에서
주위의 부러움 속에 살았으나 빛 좋은 개살구라고
병든 닭이라도 얻게 되는 날엔
온 식구가 생일이었고,
얼어죽은 참새 줍던 들녘에 남겨진
배추뿌리 건지려다 터진 손 찢기고,
개구리 다리. 메뚜기 끄슬러 대며,
깡시장 얼쩡거리다 깨진 과일 주어대던
나의 생이었어도 너무나 소중할 수밖에 없는 사연들..

또한 하늘을 바라보며
두 손 가득 웅켜잡은 병에 담긴 오렌지 쥬스를 들이키던
길 건너 부잣집 아이 앞에서
옥수수 대에 입 언저리를 베이며
타는 목 달래고 또 달래던 일..

이제 그런 모든 날들은
석양을 등에 져야하는 내게 있어선
역시 견딜 수 없도록 아름다운 것들이다.

( 일간지게재 작 )

 그리움이 어찌 만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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