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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골짜기

죽음에 대하여.. 대숲 최 계철

by 파자.다정.설야 2013. 6. 27.

.. 죽음에 대하여 ..

최 계철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갔더니
이름이 가물가물한 친구가
암으로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이다.

함께 운동을 하는 동료의
귀여운 딸아이는
얼마 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누구나 한번,
그리고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불변의 진실이다.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진실 중에서
이보다 더 정확한 진실은 없을 것이다.

확률 100%의 게임은 바로 죽음이며
그 앞에서 누구도 해방될 수 없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는 동등하고
죽음 앞에서는 관대해진다.

마치 죽음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살을 꾀하기도 한다.

생애동안 저지른 죄를 죽음이 면죄해 줄까?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죽음은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관대해야하겠지만
그 죽음이
자신이 생애 저지른 업보를
완벽히 단절하는 도구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별의 시간이 왔다.
우리는 자기 갈 길을 간다.
나는 죽고, 너는 산다.
어느 것이 더 좋은가는 오직 신(神)만이 안다” 고
소크라테스는 말하였다.

중학교 막 사춘기의 중턱을 넘을 때
특히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었다.

누구다 다 한번쯤은 경험한 것일 테지만
내 존재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두려운 것이었다.

내가 사라진다고?
도대체 어디로?
그 다음엔?
영혼은?
여기는? 이런 혼란스러움에
며칠 잠도 자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니
또렷한
(10대의 그 활발한 자아, 소유에 대한 집착)의식이
단칼에
절단 난다는 데서 비롯된 공포였을 것이다.

인생은
크게 오르막과 내리막의 두 구비이다.

오를 때는 정상이 잘 보이지 않지만
일단 올라서면
종착역이 빤히 보이는 것이다.

그 종착역이란
힘차게 달리던 기차가 마지막으로 멎는 그 자리,
곧 인생의 마지막 죽음인 것이다.

죽음은 의학적으로 뇌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그러므로 아무 의식도,
생리적인 반응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영혼이라는 것은
죽음 직전에
빠져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느 순간
의식이 가물가물 할 때가 있다.

깨어나 생각해보면
그 순간은 없는 순간,
말하자면 존재하지 않았던 무의식의 순간이다.

그 의식의 혼미가
그대로 이어지는 게 죽음이 아닌가 싶다.

죽으면 끝인가 아닌가의 논쟁은
스스로가 답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끝이라 믿는 자에게는 끝이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면
그렇지 않은 것이라야 옳다.

이 겨울이 지나면
다시 새봄이 올 것이다.

숲은 푸르고 온갖 꽃이 피며
신선한 바람이 불 것이다.

세상은
1년을 주기로 되풀이되는 것 같지만
기실 그렇지도 못하다.

그 봄을 장식하는 푸른 잎들은
작년에 여기에 무엇이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내년의 꽃은
올해의 꽃이 다시 핀 것이 아니고
나무에 돋는 잎은 올해 떨어진 잎이
다시 살아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의 꽃이 지고
잎이 떨어져야
내년의 봄이 있으니
죽음(떠남)은 곧 새로운 탄생을 기약하는 것이다.

그럼 불과 50년 전에 나는 무엇이었던가?

구천(九天)을 맴도는
어떤 존재였는가?(의식되지 않는)
아니면 그저 무(無)였는가?

그리고 또 왜 하필 그가 아닌,
내가 되었을까?
더 나은
환경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르지 않았는가?
왜 가난한 집안에서
차도 전기도 없는
섬 마을에서 태어나야만 했는가?

전에는 이런 문제에 몰두하여
원망도 많이 하였지만
이제는
정말 부질없는 의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어쩜
내가 전생에 저지른 업보 때문이 아닌가 싶다.

기억 못하는 어느 전생에
내가 저지른 일들의 대가를 지금 받고 있는 것이고
이 현실의 과보는
다음 생애에 받게 될지 모른다.

또 50년 후의 나는 무엇일 것인가?
어디에서 어떤 존재로
“나”를 이어가고 있을 것인가?

영혼은 있는가?
아니면 정녕 여기로 끝인가?
가물거리는 의식이 멎으면
그대로
“무(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가 되는 것인가?

천 상병 시인의 말처럼
여기는 기이다란 여행 중
잠깐 머문 소풍길인지도 모른다.

그럼 그 너머에는
더 넓고 더 다채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칠순의 어느 작가는
죽어서 영혼이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였다.

사랑하는 사람도 보고 싶은 사람도
이미 형체가 없는데
영혼끼리 무슨 수로 알아보는가 하는 이유였다.

글쎄. 믿으면 보여진다는데,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나오는 대목처럼
영혼에서 특별한 빛이 뿜어져 나와
그걸로
서로를 알아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로마의 철학자이며 사상가인
아우렐리우스는 죽은 자의 유해가
땅속에서 어느 일정기간 존속한 연후에
변화라는 것처럼 공중에 옮아간 영혼들도
어느 기간동안 존속한 연후에 변화하고 해산되고
거기에 살러온 새로운 영혼에게
자리를 내어준다고 하였다.

영혼이 있고 없음을 떠나
죽음에 대하여
내가 평소에 갖고있는 지론은
평화로운 마음은
바로
평화로운 죽음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것이다.

평화로운 죽음이란
태어날 때처럼 빈손인 가벼운 죽음,
냄새나는 쓰레기를 남기지 않고 떠나는
깨끗한 죽음,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맞는
우연한 죽음,
신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통의 죽음이리라.

그 가운데서
나는 혹은 길거리에서,
혹은 잠자리 등에서
아주 우연히 찾아오는 죽음을 바란다.

죽음의 순간이 그렇다면
죽은 후의 상태는 그저 무(無)이기를 바란다.

장자(莊子)는
인간은 본디
흐릿하고 아늑한 혼돈에 섞여 있다가
변해서 기(氣)가 생기고
다음 형체(形體)를 부여받고
다음 생명을 얻은 다음
다시 죽어 혼돈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죽음의 세계 또한 위로 임금도 없고
아래로 신하도 없으며
네 계절의 변화도 없고
조용히 천지와 수명을 같이할 뿐으로
죽음의 세계에서는
임금의 즐거움도
그 즐거움을 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죽은 자는 많아도
돌아온 자는 없는 것인가?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곡을 하지 않고
북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죽었다고 슬퍼할 것도
살고있다고
기뻐할 것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죽음 뒤에서
다시 돌아 나온 경우가 없고
지금은 죽기를 싫어하지만 죽어서 살아있을 때
죽기를 싫어했던 것을
후회할지도 알 수 없지만
어쨌건 단절은 단절이다.

우리의 의지의 존재를 떠나서
어렵게(?)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일과
자연의 번성에 기여하는 일은
(말하자면 나무를 심는다던가,
영혼의 정화를 위해 뭔가를 남겨주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런 일도
그리 즐거워할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가 죽어서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전의 상태가 되지 않고서는
다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약한 인간인 이상
죽음에 완전히 초연해 질 수는 없더라도
삶의 어쩔 수 없는 부분으로서 이해하려면
마음의 더러운 짐을
덜어내는 일이 가장 중요하리라.

나도 이제
나이를 많이 먹는다는 것을 실감한다.

제 이름과 얼굴에 책임을 지는 나이를 지나
인생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려야하는 나이에 접어든다.

영혼이 있고 없고는 안중에 없다.

도(道)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죽음에 순응하는 것이다.

자연이 부르면
더 오래 머물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런 마음의 총체이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그러나 분명히 오는 나의 죽음을 만나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가슴 창고에 채우는 것보다
비우기 훈련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니
그대로
훌훌 떠나는 것이 도리이다.



죽음에 대하여

대숲 최계철